세미나 정책 논평2015. 10. 14. 07:54

이 글은 시민의 소리 2015년 10월 13일자에 게재되었다.  http://www.simi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80822


지난 9월 7일 광주에 전국 최초로 ‘고려인종합지원센터’가 문을 열었다. 센터를 개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용화 고려인마을 후원회장이 9월 22일부터 30일까지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왔다. 정용화 후원회장이 보고 온 고려인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들어본다.<편집자 주>

우슈토베로 가는 길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는 130여 민족이 산다고 한다. 우리처럼 단일민족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민족이 한 나라 안에 살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일어난다. 그들 간에 충돌은 없는지, 통용하는 언어는 어떤지도 궁금하다. 고려인도 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1937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 우슈토베(Ushtobe)는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Almaty)에서 북쪽으로 5시간 정도 차로 이동해야 한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에 간간히 인적이 나타날 정도로 너른 땅에 부러운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카자흐스탄은 한반도의 12배 크기지만 인구는 1천8백만 명에 불과하다. 비록 물이 부족한 초원지대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을 데려다 논다면 그냥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우슈토베 마을 어귀 언덕에 공동묘지가 먼저 우리를 맞았다. 사나흘 뒤가 추석이라 성묘하는 사람들이 고려인인줄 알고 접근했더니 쿠르드족이다. 쿠르드족은 현재 민족갈등을 대표하고, 지금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유럽난민 사태의 원인이 되고 있는 민족이다.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 걸쳐 있는 3천만 명의 쿠르드족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학살당해 일제 때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다. 지금은 미국-이스라엘과 친분을 다지며 같은 종파인 IS와 대결하고 있어 복잡한 중동사태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다가가 인사를 나누자마자 쿠르드족 아주머니들이 성묘하기 위해 싸온 과일, 사탕, 빵 등을 손에 쥐어주었다. 옆에 있는 분도 계속 퍼주다가 아예 비닐봉투 채 안겨주었다. 고난과 슬픔을 많이 겪어 본 사람들이 정이 더 많은 것인가?

우슈토베 마을에 들어서자 인발렌티나 여사(73)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1943년생으로 고려인 2세다. 당시에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에서 학교선생님으로 의무복무를 마친 후 우슈토베마을이 속해있는 군의 부군수로 퇴임한 인텔리다.

강제이주 고려인, 독일인이지만

고려인 남편은 우리말로 소통이 어려웠으나 인여사는 또박또박 고려인 정착의 역사를 설명해주었다. 연해주에서 기차에 태워진지 한 달 만에 우슈토베역에 도착했지만 거처할 곳이 없어 토굴을 짓고 살았던 현장으로 안내했다.

토굴 옆은 공동묘지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지 참담한 심정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토굴 주위 반경 10km 이상이 녹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너른 들판이다.  고려인들이 황무지를 일궈 논밭으로 바꾼 바로 그 현장이다. 멀리 떨어진 카라탈 강에서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다. 물이 있다고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소금기가 빠질 때까지 흉년을 견뎌야 했다. 지금도 지력이 약해 쌀, 밀, 옥수수, 감자 등을 해마다 윤작하고 있다.

우슈토베 작은 시골마을에도 인종이 다양하다. 완전한 백인인 러시아민족부터 독일민족, 우리와 같은 몽골계인 카자흐민족, 이란계, 인도계, 다양한 혼혈족 등 사람 구경만 해도 재미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다양한 민족들이 고려인처럼 대부분 강제 이주당해 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독일인들은 2차대전 중에 수십만명이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당했다. 독일과 전쟁을 치르는 소련의 입장에서 국경 부근의 독일인은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인도 소련의 입장에서는 같은 처지였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 등지로 망명했고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지역은 조선 독립군 양성의 터전이 되었다.

소련 정부는 대한독립군의 일본군 공격으로 일본과의 국경 분쟁을 피하기 위해 연해주 일대 한인 집단촌의 강제 이주를 결정했다. 한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이 일본에게 대소 선전포고의 구실을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인민위원회는 1937년 8월 21일 ‘극동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조선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이에 따라 약 17만 명의 한인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통일독일, 구소련 이주 독일인 영주권 부여

카자흐스탄을 포함하여 구소련 및 동구권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1992년 소련 해체 후 수십만 명이 독일로 돌아갔다. 통일독일 정부가 그들에게 영주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에는 지금도 30만 명의 독일인이 살고 있으며, 새 수도 아스타나에는 독일인이 6%를 차지한다고 한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은 현재 카자흐스탄에 10만여 명, 우즈베키스탄에 17만여 명, 러시아에 17만여 명 등 CIS(구소련의 후신인 독립국가연합)에 48만여 명이 살고 있다.

카자흐스탄 130여 민족 중에 고려인은 제3의 민족으로 꼽힌다.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 때 카자흐스탄 선수단장이 한 말이다. 실제로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0.6%에 불과하지만 50대 재벌 중 5명을 비롯해 카자흐스탄 독립시 헌법 제정을 주도했고 이후 법무장관,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김유리씨,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가장 신임해 오랫동안 금고지기로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했던 이블라지미르씨 등 많은 고려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고려인의 90%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3천여명이 살고 있는 광주고려인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특히 많은 온 이유가 무엇일까? 수도 타슈켄트와 인근 고려인 집단촌을 둘러본 결과 그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들이 고국을 찾은 주된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다. 우즈벡은 농광업 등 1차산업이 60%로 산업화가 미진하여 3천만의 인구에게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인당 소득이 3천달러로 빈국에 속한다. (참고로 카자흐스탄은 1만2천달러)

고려인집단촌 시온고마을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거의 모두가 이산가족이다. 마을 이장님댁은 추석을 하루 앞두고 4대가 모였는데, 둘째 며느리가 평택에 산다고 한다. 돈벌러 나간 아내와 딸을 한국에 두고 있는 둘째 아들은 쓸쓸한 표정이 역력했다.

시온고마을 노인들은 한국말을 배우고 또 잊지 않기 위해 합창단을 꾸려 노래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당에 혼자 놀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가 노래연습이 끝나고 나오자 손잡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의 부모는 안산에서 일한다고 한다. 자식들이 한국에 일하러 나가거나 혼자된 노인들은 아리랑요양원에서 수용하고 있다.

타슈켄트 시내에서 30분 떨어진 곳에 김병화농장이 있다. 김병화는 소련시절 노동영웅으로 그 이름은 타슈켄트의 한 거리와 고등학교에도 쓰이고 있다. 3,100ha의 토지에서 1,900가구, 7,800명이 거주한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양과 운영방식이 소련전체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인 정착 특별법은 ‘표류중’

김병화 선생께 직접 배우고 그 밑에서 일했다는 고려인 2세 태에밀리아(75세) 할머니는 김병화박물관에서 당시의 번성했던 시절을 회고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고려인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려인은 도시로, 한국으로 대부분 빠져나가고 대신 우즈벡인으로 채워졌다. 한국어를 직접 가르치려 한국어교실을 열었지만 오는 이가 몇 안 된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은 카자흐스탄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러시아어 대신 우즈벡어를 강요하고 있다. 우즈벡어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직장도 점점 구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그런데 성인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어디 쉬운가? 고려인들이 겪고 있는 언어문제가 이들을 다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고국인 한국에 와서도 이들은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다. 동포임에도 대부분 우리말을 못하기 때문에 자기 주장도 못하고 막노동현장을 전전하고 있다. 우리말에 불편함이 없어 여러 분야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 중국동포(조선족)들과 비교된다.

자립생활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고려인동포들이지만 이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다문화가족보다 못하다. 외국인노동자와 같은 방문취업비자(H2)로 입국해 성실히 일하다 3년후 귀국해야 하며, 이런 사정을 악용한 일부 사업주들의 임금착취 등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의 예를 들 것도 없이 고려인동포들을 품어 안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의무이다. 이러한 것들을 시정하기 위해 입법청원한 ‘고려인정착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이 아직도 표류중이다. 국회의원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미나 정책 논평2015. 10. 13. 10:09

(이 글은 남도일보 2015년 10월 13일자 5면에 축약 게재되었다.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93767

빛가람뉴스에는 전문이 게재되었다. 

http://www.focu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19 )


[주] 지난 9월 7일 광주에 전국최초로 ‘고려인종합지원센터’가 문을 열었다. 센터를 개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정용화 고려인마을 후원회장이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2부작 “유라시아를 잇는 희망, 고려인”의 출연자로 제작팀과 함께 동행한 것이다. 정용화 후원회장이 보고 온 고려인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들어본다.


  
지난 9월 7일 열린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개소식좌로부터 ; 정용화 후원회장 /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 / 이천영 고려인마을 협동조합 이사장 (자료사진)

 카자흐스탄의 하늘은 어느 곳보다 크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위가 모두 하늘이다. 징키스칸의 후예로 자부하는 카자흐민족에게 경계는 달리는 말이 지칠 데까지였을 것 이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땅보다 하늘이 더 눈에 들어왔을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국기는 하늘색 바탕에 노란 태양이 그려져 있다. 한반도의 12배 크기지만 인구는 1,800만이니 얼마나 많은 땅이 ‘버려져’있을까 부러움이 앞선다.

  
▲ 천산을 배경으로 한컷한 정용화  고려인마을 후원회장, 광주U대회 조직위 부위원장 [전체사진제공/정용화 고려인마을 후원회장, 광주U대회 조직위 부위원장)

이 기회의 땅에 강제이주로 도착한 고려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1937년 10월 9일 우슈토베역에 짐짝처럼 부려진 고려인들은 우선 추위부터 피해야 했다. 하지만 온통 평지라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줄 언덕부터 찾았다. 역에서 북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몰려갔다. 그 아래에 토굴을 짓고 이듬해 4월까지 겨울을 꼬박 그 속에서 보내야 했다.(사진1)


  
사진1


말이 평야지 사막에 가까운 황무지에 식량 한 톨 구할 수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는지 통계조차 없다. 토굴 옆은 바로 공동묘지가 되었다. (사진2)


  
사진2


황무지를 옥토로 


겨울이 지나자 고려인들은 습관처럼 농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물이 없다. 멀리 떨어진 카라탈강에서 물을 끌어와야만 했다. 남녀노소 모두 달려들어 수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논의 형상을 만든 다음 소금기가 빠져 볍씨를 뿌릴 정도가 되도록 기다렸다. 그동안 또 굶주림에 얼마나 죽어나갔는지 모른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식들 교육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민족적으로든 이 불행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교육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강제이주 이듬해, 거처가 정해지자마자 마을 입구 제일 좋은 땅에 학교를 지었다. 이름은 ‘원동학교’, 강제이주 전 연해주에 있던 학교이름을 그대로 썼다. (사진3)


  
사진 좌로부터 3, 4,5


시간이 지나자 노력의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우슈토베 인근 수백만평이 농토로 변했다. 고국에서 보던 황금벌판이 다시 펼쳐졌다.(사진4) 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다시 끌어올렸다. 블라디보스톡의 위도가 43도이고 우슈토베가 45도이니 2도를 끌어올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슈토베마을의 마크에는 벼가 그려져 있다. (사진5)


탁월한 민족성 


원동학교에서 공부한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소련 전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김유리씨는 카자흐스탄 독립시 헌법제정을 주도했고 이후 법무장관, 헌법재판소장을 지냈고, 김아나톨리씨는 소련의 국민작가로, 빅토르최(초이)는 전설적인 록 가수로 구소련 전역에서 사랑받았다. 우슈토베가 속해있는 카라탈 군수를 지낸 김로만씨는 현재 하원의원이자 고려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외에도 최유리 전 상원의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가장 신임해 오랫동안 금고지기로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했던 이블라지미르씨, 세계적인 구리광산을 소유한 카작므스의 김블라지미르씨 등 많은 고려인들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고려인이 10만 6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0.6%에 불과하지만 50대 재벌 중 5명이 고려인이며, 카자흐스탄 130여 민족 중에 3대 민족으로 꼽힌다.(광주U대회 카자흐스탄 선수단장의 말)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고려인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교통부장관이자 국영항공사 사장인 장발레리씨, 고려인협회장이자 하원의원인 신블라디미르씨, 상원의원인 박베라보리소나씨, 역사연구소 부소장인 한발레리씨, 화가 신니콜라이(신순남)씨 등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정부로부터 ‘최고 교수’칭호를 받은 하바로프스크 국립대학의 강엘레나씨, 물리학분야의 권위자인 홍유리안드레예비치 박사, 소수민족출신으로 최초의 대학총장이 된 김게오르기니콜라이비치 국립공업수산대학 총장, 하원의원인 장류보미르씨 등이 있다.


고려인들의 성공요인은 무엇보다 교육열과 특유의 근면, 성실성이라고 한다. 해당국가의 관대한 소수민족정책도 주요 배경이다. 여기에 최근 한국기업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한국에 대한 호감이 더해져 타민족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성공사례를 남기고 있다고 한다. 우즈벡의 고려인 안내자는 “우즈벡정부가 한국을 보고 고려인을 대접하고 있다”고 까지 말한다.


언어의 문제 


우슈토베에 고려인이 중심이다 보니 이주해 온 다른 민족들도 고려말을 거의 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원동학교는 예스켈디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220명의 초중고과정 학생 중 고려인은 30명에 불과하다. 고려인 선생님도 전체 30명 중 7명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갔기 때문이다. 한국어교실에는 태극기와 단군초상이 전면에 걸려있고 벽에는 한국의 풍습과 자연 사진이 붙어있고, 뒷쪽에는 장구, 북 등 소품이 놓여있다.


  
사진 6


한국어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려인아이들이지만,(사진6) 이들에게도 한국어보다 시급한 것이 카자흐어라고 한다. 고려인들이 지금 대부분 한국말을 못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지금도 구소련시대처럼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쓰이지만 1992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점차 카자흐어, 우즈벡어가 중심이 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민족이 60% 정도이기 때문에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즈벡민족이 85%정도이고 민족주의가 강화돼 우즈벡어가 단일한 국어이고, 러시아어는 여러 민족간에 통용어로 쓰이지만 공용어로서 위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우즈벡에서 제1외국어가 러시아어가 아니고 영어라고 하니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고려인들의 처지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새 국어를 배워야 하는데 나이들어 새 언어를 배운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런데 흥미롭고도 슬픈 사실이 카자흐나 우즈벡 민족들 보다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더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자흐어나 우즈벡어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통이어서 어순이 같지만, 러시아어는 영어와 어순이 같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카자흐나 우즈벡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우리가 일본어를 배우는 것과 같고,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구조다. 실제로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때 통역자원봉사로 온 고려인과 카즈흐인 대학생 중 카자흐인이 우리말을 훨씬 잘해 고려인으로 착각한 적이 있다.


더 심각한 우즈벡 고려인 


광주고려인마을에 거주하는 3천여명의 고려인 중 90%가 우즈벡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고국을 찾은 주된 이유는 첫째는 일자리 때문이다. 우즈벡은 농광업 등 1차산업이 60%로 산업화가 미진하여 3천만의 인구에게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인당소득이 3,000달러로 빈국에 속한다. (참고로 카자흐스탄은 12,000달러) 둘째는 언어문제가 있다. 카자흐에서는 러시아어로 버틸 수 있지만 우즈벡에서는 러시아어만으로는 버티기가 점점 어렵게 되고 있다. 우즈벡어를 배워 우즈벡민족처럼 살던가, 러시아로 이주하던가, 조상의 땅 한국으로 돌아가던가 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에 온 고려인들이 대부분 한국어도 못하기 때문에 변변한 일자리도 갖지 못하고 막노동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동포인 조선족은 우리말에 거의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다방면에 취업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막노동에 취업한 고려인들은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적기 때문에 고국에서도 정착을 못하고 대부분 겉돌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집단촌 시온고마을을 방문했는데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마을이장 댁에는 4대가 모여 추석 차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게는 가족사진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이장님 부부의 회갑잔치를 기념하여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한마디로 밝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것이 작은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한국의 고려인들이 어두운 표정에 기를 펴지못하고 막노동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과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민족인데 한국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시온고마을 노인회관에서는 할머니들이 노래방기계에 맞춰 아리랑・늴리리 맘보와 같은 노래를 배우고 있었다. 몇 마디 우리말은 해도 한글을 읽지 못해 발음기호를 적어두고 있었다. 우리말을 배우고 지켜나가기 위한 몸부림이 느껴졌다. (사진7)


  
사진 7


고려인에 먼저 손 내민 광주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고려인1세 천미하일 어르신(91세)이나 고려인2세 중에서도 안발렌티노씨(75)처럼 식자층에서는 한국어 소통에 불편함이 없지만 그 이하는 한국어가 거의 안되는 형편이다. 그 이유는 집에서도 부모들이 한국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소련시절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던 김병화씨는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고 하여 현지 정착에 심혈을 기울였고, 1992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만 해도 강제이주 당했다는 것조차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사진8)


  
사진8


타쉬켄트 시내에 있는 세종학당을 방문했다. 교장은 전남대를 졸업한 허선행씨여서 더 반가웠다. 허교장은 한국과 우즈벡이 수교를 맺은 직후인 92년에 이곳에 와 24년째 생활하면서 한국어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김중채 임방울재단 이사장, 전남도의회, 신정훈 나주 시장 등 광주 전남의 유지들의 지원으로 유지되었고, 경기도에서 도서관을 신축해 주면서 한글학교다운 면모를 갖추었으며, 2011년 부터는 세종학당으로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고려인과 가장 먼저 인연이 맺어진 곳이 광주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운 감동을 느꼈다.


  
사진9


세종학당에는 우즈벡 청년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사진9) 그들에게 적지 않은 학비를 부담하고도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한국에 유학을 가거나, 한국과 관련된 기업에 일하고 싶거나, K-팝 ・ 한국요리 등 한국이 좋아서 라는 등 다양했다. 국력과 함께 국어의 힘도 비례한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유라시아를 잇는 희망 고려인 


이번 여행은 고려인을 과거의 관점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본의 아니게 그곳에 갔지만 미래 유라시아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고려인들이 불쌍하니까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유라시아를 잇는 매개자로서 육성하자는, 미래투자로서 의미를 새롭게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미래는 미국, 일본, 중국을 넘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특히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우리나라와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나라다. 그 나라에는 넓은 땅과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지만 기술과 자본이 부족하고, 우리는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인종이 같은 계통이라 쉽게 친해질 수 있다. 실제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대통령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도 한국을 아주 좋아하고 경제협력 사업을 늘려가고 있다.


고려인은 유라시아시대의 매개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이 78년 동안 피땀으로 닦아놓은 터전에 고국의 발전이 짝을 이루어 한국인을 부르고 있다. 우리가 러시아어, 카자흐어, 우즈벡어를 새로 배우지 않아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고려인들이 고국에서 우리말을 제대로 배워 더 나은 일자리도 찾고, 자존감을 회복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이 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돌아가더라도 한국과 매개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려인가정과 자매결연하자 ; 고려인동포에게 영주권을 주고 정착을 지원하는 특별법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들이 한국어를 하지 못하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요체는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빨리,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독려하는 것이다. 광주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는 고려인들의 한국어 교육에 비중을 늘려나갈 것이다. 지자체에서도 한국어교육지원에 더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말을 배우는 가장 빠른 길은 함께 먹고 자며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으니 우선 고려인가정과 일반가정의 자매결연을 제안한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상호방문하여 음식도 나누고 대화도 하고 어려운 점을 보살펴준다면 그들의 정착도 더 쉽고 빨라질 것이다. 일반가정에서는 유라시아시대의 언어 러시아어를 배울 수도 있다. 다시한번 다정다감으로 세계를 열어가는 광주시민의 모습을 함께 만들어 보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미나 정책 논평2014. 12. 23. 13:37

(이 글은 동아일보 2014년 12월 23일자에 게재된 기고문의 원문(축약전)입니다. 

신문게재본은  [기고/정용화]고려인 동포 외면하는 현실부터 고치자

http://news.donga.com/3/all/20141223/68725788/1 )


다문화가족보다 못한 처지의 고려인동포


금년이 고려인이주 150주년이라는 이유로 언론에서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서쪽 끝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유라시아를 횡단하거나 자동차를 타고 북한을 거쳐 부산까지 몇 달 걸리는 행사를 치러냈고, 고려인의 역사를 담은 특집방송을 여러차례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현실은 그렇게 야심차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현지에서의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꿈에 그리던 조상의 땅으로 돌아온 고려인들조차 일반 다문화가족 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 고려인동포들은 입국비자에서 미국이나 일본동포에 비해 차별받고 있다. 방문취업(H2)비자로 입국한 동포들은 3~5년 후 돌아가야 해 입국시차가 있는 가족들은 다시 이산가족이 되어야 한다. 해외동포비자(F4)로 입국한 동포들은 단순노무를 할 수 없도록 되어있어 불법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이들은 한국어를 제대로 못해 생활적응력도 떨어지고 노동현장에서도 가장 하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한 일부 고용주들이 임금을 체불하거나 착취해도 저항하기 힘들어 자살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결혼이민자는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의 다양한 복지정책과 다문화정책에 흡수되어 혜택을 받고 있고, 외국인노동자의 경우도 비자(E9)의 특성상 취업처가 정해져 있어 노동법의 테두리 안에서 관리되고 있으나 고려인동포들은 순수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법적 보호와 혜택을 전혀 받지못하고 있다.

 

특히 고려인 아이들은 다문화가정과 국내 저소득층 분류에 속하지 않아 저소득층과 한부모가정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지자체에서 방치되고 있다. 지역아동센터 역시 고려인들은 외국인 신분으로 자격조건에서 제외되어 혜택을 못받고 있다. 출산 및 보육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렇게 된 데는 고려인동포를 조선족동포들과 한 묶음으로 생각하는 정책당국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인동포와 조선족동포는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고려인동포들은 조선족동포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다.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강제로 흩어져 살게된 이후 고려인들은 생존자체가 급선무였다. 중국동포들은 언어문화공동체를 이뤄 자치주를 인정받고 삶의 터전이 비교적 양호하지만, 고려인동포들은 조상의 말을 잃어버릴 정도로 힘든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한국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한민족으로서 150여년을 살아왔던 민족정체성마저 부정당해 고려인동포들은 지금 조상의 땅에서 더 큰 상처를 받고 있다. 언어, 인종, 종교적 차별 속에 유라시아를 유랑하다가 조상의 땅에 정착하고자 새 희망을 품고 왔지만 고국에서도 유랑생활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고려인동포들은 돌아갈 곳이 없고 영구귀국을 바란다. 중국동포들은 대부분 자신이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한국에서 돈을 벌어 돌아가려고 한다. 중국이 날로 성장하고 있는데다 중국에 돌아가도 별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인동포들은 주변부로 밀리다 밀려 왔기 때문에 돌아갈 곳이 없고 마지막 고국에 뼈를 묻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나라를 잃어 해외에서 유랑하게 된 동포들을 조국의 품에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 의무이기도 하다.

 

셋째, 고려인동포들은 유라시아 시대를 열어갈 소중한 자산이다. 이들은 고난 속에 한민족의 유라시아를 개척했고, 다가올 통일한국의 유라시아 시대를 열어갈 선구자들이다. 조선족의 중국 동북3성과 고려인들의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를 잇는 한민족벨트는 민족문화 전파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인을 품어안는 것은 동포애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미래를 위한 투자로 보아야 한다. 국내외 고려인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 등 체계적인 정착 및 생활지원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고려인동포 특별법2013년부터 시행되었지만 거주국(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생활안정 지원 위주여서 정작 국내에 체류하는 동포들은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국내체류 동포 지원근거를 마련하는 내용의 고려인동포 특별법 개정안이 최근 새누리당 이인제의원을 대표로 하여 국회에 발의되었다. 조속히 통과되어 고려인동포들의 눈물을 걷어주기 바란다.

 

차제에 50여만명의 고려인동포들에게 영주권을 부여할 것을 제안한다. 다문화정책으로 많은 예산과 정책이 투입되고 있는데 그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 동포들에 대한 것이 아닌가? 현재 2만여명이 입국해 있는데 생김새나 정체성, 문화 모든 면에서 그들은 가장 빨리 한국인이 될 수 있다. 특히 그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은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확실한 대책도 될 수 있다


독일은 소련이 해체되자 160여만명의 독일계에 영주권을 부여하였다. 나라잃은 설움을 3~4세대에 걸쳐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우리말을 못해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동포들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정책을 촉구한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