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정책 논평2014. 11. 28. 08:35

(이 글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일주일 후(4.22) 쓴 글인데, 당시에는 너무 충격이 커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아내의 지적에 덮어두었다가 '세월호3법'이 통과되고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겨울을 맞아 조심스럽게 올린다)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의 참사에 온국민이 비통한 마음에 잠겨있다. 어느 사고보다도 더 마음이 아픈건 희생자의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말을 믿고 움직이지 않다가 참변을 당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른으로서 부끄럽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 명이라도 더 구조의 소식을 듣고자 틈만 나면 방송에 귀기울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북받치는 눈물을 참기 어렵다.

 

처음 소식을 접하고 철렁한 가슴에다 끝내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 것은 아이들의 마지막 문자소식이다. “엄마, 내가 말못할까봐 보내놓는다. 사랑해학교 연극부 카톡방에는 한 학생이 연극부 다들 사랑해. 우리 죽을것 같아.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해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눈물이 쏟아진다)

 

2003년 대구지하철이 화염에 휩싸여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도 가족에게 간절한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다. 가방이랑 신발 못 전하겠어. 돈가스도 해주려고 했는데... 미안... 내딸아 사랑해

20019.11테러로 희생된 이들 중 죽음 앞에 선 딸이 엄마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에서도 엄마 지금 납치당했어. 저기에 세명이 폭탄을 가지고 있대. 엄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무너져내리는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낸다. “사랑해.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여보 당신을 사랑해. 정말 사랑해. 살아서 당신을 다시 봤으면 좋겠어. 안녕” (경향신문 2014. 4. 18 ‘마지막 문자 사랑해”’)

 

왜 사람들은 죽음을 직감하고 마지막 남기는 말이 대부분 사랑한다는 말일까? 사고 일주일째를 지나는 지금 곱씹은 궁금증을 스스로 풀어본다.

 

죽는 순간에 외치는 마지막 말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리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사랑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제 나에게 이렇게 들린다.

 

사랑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래서 죽어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죽어서도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가 아닐까? 사랑을 줄 상대가 있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아닐까? 반면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은 사랑을 잃어 그 누구도 더 이상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사랑이 있으면 죽어도 살아있으며, 사랑이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 아닐까?

 

아침 라디오에서 애절하게 흘러나온 노랫소리가 대답해주었다.

 

태양은 왜 계속 비치나요?

바다는 왜 계속 파도치나요?

몰라요 그들은, 세상이 끝나는 날이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인 것을

 

새들은 왜 계속 지저귀나요?

별들은 왜 하늘 위로 올라가지요?

몰라요 그들은, 세상이 끝나는 날이

당신의 사랑을 잃어버린 때인 것을

 

아침에 눈을 뜨면 모르겠어요

왜 모든 것이 변함없이 돌아가는지

난 이해할 수 없어요, 정말로

어떻게 삶이 그대로 지속될 수 있는지

 

내 심장은 왜 계속 뛰지요?

눈물은 왜 계속 쏟아지지요?

몰라요 그들은, 세상이 끝나는 날이

당신이 안녕이라고 말한 때인 걸


(Skeeter Davis의 노래, The End of the World)

 

천사같은 우리 아이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미나 정책 논평2014. 5. 3. 07:58

슬픔과 분노의 파도가 대한민국을 덮치고 있다. 젊은 영혼들이 수장되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면서 통곡과 절규,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온 국민이 몸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과연 이게 나라인가?” “이 나라를 믿고 살 수 있는가?” “세금내고 애국할 대상인가?” “정부와 정치가 해줄 수 있는게 무엇인가?” 라는 절망섞인 질문에 정치학자이자 한때는 정치인이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국가적 재난상황에 그 존재이유를 보여야 할 정치와 정치인들은 뒤로 숨기에 바쁘고 국민감정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다. 대통령의 책임 회피와 사과 지연에 분노한 국민은 야당지도자의 네 탓공방에 남은 기대마저 거둬들이고 있다. 사과와 개각, 선거패배로 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일인가?

 

말발있는 사람들, 글발있는 사람들은 차제에 시스템과 구조개혁을 주장한다. 보수언론들은 관피아를 척결하고, 재난관리콘트롤센터를 만들고, 권한과 책임있는 장관임명 등 인사시스템을 개혁하고 나아가 국가개조론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 사고의 배경에 주목하는 진보언론들은 비지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운 전 대통령의 책임부터 비정규직, 계약직의 노동조건에서는 책임감을 갖기어렵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철폐해야 하며, 돈이 지배하는 구조적 폭력이 자기만 살려는 비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었다면서 진짜 살인자는 선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고까지 주장한다.

 

양적성장 위주에서 질적 성장으로 국가발전노선을 전환하고 책임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대통령은 관련자를 엄벌하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대책이 유족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을까? 국민들이 정부와 정치에서 새로운 희망과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지금 답답한 심정이 분노로 전환된 이유는 분초를 다투는 현장에서 서둘렀으면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죽게내버려둔 당국의 무능과 절차위주의 행정, 자기 할 일은 안하고 윗선만 바라보는 담당자들의 행태, 그리고 정작 윗사람은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모습 때문이 아닌가?

 

문화한류와 스포츠스타들로 키워진 국민적 자부심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능한 정부아래서 살고 있다는 허탈과 분노로 대체되고 있다.

 

대통령의 눈과 귀가 막혀있기를 이승만정권의 말기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역대정부를 서민()공감정부에 이어 기업()공감정부”, 그리고 지금은 무공감(아무도 공감하지 않는)정부라는 비아냥도 들린다. 국민들은 자기책임이라며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데 정작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 그 중의 최종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심판자, 관전자, 호통자로 남아있다.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에 찾아갔을 때 유족들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 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유족들을 부둥켜안고 같이 눈물흘리며 위로하고(국민의 어머니로서)... 현장상황에 불만을 표출한 유족들이 청와대로 향해갈 때 즉시 현장에 내려와 불만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제가 무한책임을 지겠습니다.”하면서 시정조치를 지시하고...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아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 전반을 재점검하겠다. 1년만 시간을 달라. 1년후 재신임을 묻겠다.” 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가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고 총리 사퇴를 비겁한 짓이라고 공격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 보다 먼저 국민 앞에 무릎꿇고 죄송합니다 저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야당 역할 제대로 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대통령이든 야당이든 여당이든 정치인을 불신하고 우리하고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국민들과 정()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면서도 국민의 안위에 대해서는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맹자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고 했고, 그 사례로 홍수를 다스린 우임금님은 세상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가 그를 물에 빠져 죽게 한 것처럼 여겼고, 농사를 가르친 후직은 세상에 굶주리는 이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굶주리게 한 것처럼 여겼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스리는 것은 권세욕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의무감에서 하는 일이고, 권위를 자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비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정과 의무감을 가진 대통령이라면 비정규직 문제도, 신자유주의 문제도 눈에 들어왔을 것이고, 현장을 내몸과 같이 챙길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했을 것이다. 내탓이 아니고 남의 탓만을 따지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시스템이 잘 갖춰진다 한들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새로운 확신과 태도가 생겨나지 않은 채 구조만 바꾸면 그 구조는 오래지 않아 또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정치를 하면 먼저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선장은 선장다워야 한다!

 

나는 나다운가? 나는 내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안산 임시분향소에서 비를 맞고 돌아오며 눈물 속에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탓입니다!” (2014-4-28)

 

(미디어펜 2014. 5.7 게재 http://www.mediape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6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