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정책 논평2015. 10. 14. 07:54

이 글은 시민의 소리 2015년 10월 13일자에 게재되었다.  http://www.simi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80822


지난 9월 7일 광주에 전국 최초로 ‘고려인종합지원센터’가 문을 열었다. 센터를 개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용화 고려인마을 후원회장이 9월 22일부터 30일까지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왔다. 정용화 후원회장이 보고 온 고려인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들어본다.<편집자 주>

우슈토베로 가는 길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는 130여 민족이 산다고 한다. 우리처럼 단일민족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민족이 한 나라 안에 살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일어난다. 그들 간에 충돌은 없는지, 통용하는 언어는 어떤지도 궁금하다. 고려인도 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1937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 우슈토베(Ushtobe)는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Almaty)에서 북쪽으로 5시간 정도 차로 이동해야 한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에 간간히 인적이 나타날 정도로 너른 땅에 부러운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카자흐스탄은 한반도의 12배 크기지만 인구는 1천8백만 명에 불과하다. 비록 물이 부족한 초원지대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을 데려다 논다면 그냥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우슈토베 마을 어귀 언덕에 공동묘지가 먼저 우리를 맞았다. 사나흘 뒤가 추석이라 성묘하는 사람들이 고려인인줄 알고 접근했더니 쿠르드족이다. 쿠르드족은 현재 민족갈등을 대표하고, 지금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유럽난민 사태의 원인이 되고 있는 민족이다.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 걸쳐 있는 3천만 명의 쿠르드족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학살당해 일제 때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다. 지금은 미국-이스라엘과 친분을 다지며 같은 종파인 IS와 대결하고 있어 복잡한 중동사태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다가가 인사를 나누자마자 쿠르드족 아주머니들이 성묘하기 위해 싸온 과일, 사탕, 빵 등을 손에 쥐어주었다. 옆에 있는 분도 계속 퍼주다가 아예 비닐봉투 채 안겨주었다. 고난과 슬픔을 많이 겪어 본 사람들이 정이 더 많은 것인가?

우슈토베 마을에 들어서자 인발렌티나 여사(73)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1943년생으로 고려인 2세다. 당시에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에서 학교선생님으로 의무복무를 마친 후 우슈토베마을이 속해있는 군의 부군수로 퇴임한 인텔리다.

강제이주 고려인, 독일인이지만

고려인 남편은 우리말로 소통이 어려웠으나 인여사는 또박또박 고려인 정착의 역사를 설명해주었다. 연해주에서 기차에 태워진지 한 달 만에 우슈토베역에 도착했지만 거처할 곳이 없어 토굴을 짓고 살았던 현장으로 안내했다.

토굴 옆은 공동묘지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지 참담한 심정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토굴 주위 반경 10km 이상이 녹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너른 들판이다.  고려인들이 황무지를 일궈 논밭으로 바꾼 바로 그 현장이다. 멀리 떨어진 카라탈 강에서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다. 물이 있다고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소금기가 빠질 때까지 흉년을 견뎌야 했다. 지금도 지력이 약해 쌀, 밀, 옥수수, 감자 등을 해마다 윤작하고 있다.

우슈토베 작은 시골마을에도 인종이 다양하다. 완전한 백인인 러시아민족부터 독일민족, 우리와 같은 몽골계인 카자흐민족, 이란계, 인도계, 다양한 혼혈족 등 사람 구경만 해도 재미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다양한 민족들이 고려인처럼 대부분 강제 이주당해 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독일인들은 2차대전 중에 수십만명이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당했다. 독일과 전쟁을 치르는 소련의 입장에서 국경 부근의 독일인은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인도 소련의 입장에서는 같은 처지였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 등지로 망명했고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지역은 조선 독립군 양성의 터전이 되었다.

소련 정부는 대한독립군의 일본군 공격으로 일본과의 국경 분쟁을 피하기 위해 연해주 일대 한인 집단촌의 강제 이주를 결정했다. 한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이 일본에게 대소 선전포고의 구실을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인민위원회는 1937년 8월 21일 ‘극동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조선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이에 따라 약 17만 명의 한인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통일독일, 구소련 이주 독일인 영주권 부여

카자흐스탄을 포함하여 구소련 및 동구권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1992년 소련 해체 후 수십만 명이 독일로 돌아갔다. 통일독일 정부가 그들에게 영주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에는 지금도 30만 명의 독일인이 살고 있으며, 새 수도 아스타나에는 독일인이 6%를 차지한다고 한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은 현재 카자흐스탄에 10만여 명, 우즈베키스탄에 17만여 명, 러시아에 17만여 명 등 CIS(구소련의 후신인 독립국가연합)에 48만여 명이 살고 있다.

카자흐스탄 130여 민족 중에 고려인은 제3의 민족으로 꼽힌다.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 때 카자흐스탄 선수단장이 한 말이다. 실제로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0.6%에 불과하지만 50대 재벌 중 5명을 비롯해 카자흐스탄 독립시 헌법 제정을 주도했고 이후 법무장관,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김유리씨,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가장 신임해 오랫동안 금고지기로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했던 이블라지미르씨 등 많은 고려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고려인의 90%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3천여명이 살고 있는 광주고려인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특히 많은 온 이유가 무엇일까? 수도 타슈켄트와 인근 고려인 집단촌을 둘러본 결과 그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들이 고국을 찾은 주된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다. 우즈벡은 농광업 등 1차산업이 60%로 산업화가 미진하여 3천만의 인구에게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인당 소득이 3천달러로 빈국에 속한다. (참고로 카자흐스탄은 1만2천달러)

고려인집단촌 시온고마을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거의 모두가 이산가족이다. 마을 이장님댁은 추석을 하루 앞두고 4대가 모였는데, 둘째 며느리가 평택에 산다고 한다. 돈벌러 나간 아내와 딸을 한국에 두고 있는 둘째 아들은 쓸쓸한 표정이 역력했다.

시온고마을 노인들은 한국말을 배우고 또 잊지 않기 위해 합창단을 꾸려 노래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당에 혼자 놀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가 노래연습이 끝나고 나오자 손잡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의 부모는 안산에서 일한다고 한다. 자식들이 한국에 일하러 나가거나 혼자된 노인들은 아리랑요양원에서 수용하고 있다.

타슈켄트 시내에서 30분 떨어진 곳에 김병화농장이 있다. 김병화는 소련시절 노동영웅으로 그 이름은 타슈켄트의 한 거리와 고등학교에도 쓰이고 있다. 3,100ha의 토지에서 1,900가구, 7,800명이 거주한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양과 운영방식이 소련전체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인 정착 특별법은 ‘표류중’

김병화 선생께 직접 배우고 그 밑에서 일했다는 고려인 2세 태에밀리아(75세) 할머니는 김병화박물관에서 당시의 번성했던 시절을 회고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고려인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려인은 도시로, 한국으로 대부분 빠져나가고 대신 우즈벡인으로 채워졌다. 한국어를 직접 가르치려 한국어교실을 열었지만 오는 이가 몇 안 된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은 카자흐스탄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러시아어 대신 우즈벡어를 강요하고 있다. 우즈벡어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된 직장도 점점 구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그런데 성인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어디 쉬운가? 고려인들이 겪고 있는 언어문제가 이들을 다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고국인 한국에 와서도 이들은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다. 동포임에도 대부분 우리말을 못하기 때문에 자기 주장도 못하고 막노동현장을 전전하고 있다. 우리말에 불편함이 없어 여러 분야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 중국동포(조선족)들과 비교된다.

자립생활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고려인동포들이지만 이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다문화가족보다 못하다. 외국인노동자와 같은 방문취업비자(H2)로 입국해 성실히 일하다 3년후 귀국해야 하며, 이런 사정을 악용한 일부 사업주들의 임금착취 등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의 예를 들 것도 없이 고려인동포들을 품어 안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의무이다. 이러한 것들을 시정하기 위해 입법청원한 ‘고려인정착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이 아직도 표류중이다. 국회의원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